1982년 11월 마지막 날 발매된 ‘Thriller’는 해를 넘긴 1983년 2월부터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라 1년 넘게 정상을 독점했다. 빌리젠, 비트아이트를 포함한 싱글차트 히트곡이 잇따라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앨범 판매량이 폭주하기 시작해 일주일에 100만장씩 팔리는 열풍을 일으켰다. 1년 내내 릴레이 경주처럼 연이어 낸 싱글 하나하나가 모두 빌보드 싱글 차트 탑텐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통계치가 다를 수 있지만 ‘Thriller’는 1983년 한 해에만 미국에서 2,000만장, 월드 기록 3,000만장 이상 팔렸고 1984년에도 빌보드 앨범 차트 1위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햇수로 따지면 3년차에 접어든 앨범이 음반점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현상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혼신의 힘을 다해 ‘Thriller’를 녹음한 1982년은 앨범 판매가 바닥을 친 불경기였다. 메이저 음반사들은 모두 매출이 줄고 적자를 기록해 직원을 해고하는 최악의 한 해를 보냈다. 퀸시 존스와 제작진이 녹음 중 “이번 앨범은 200만장 팔리면 대단하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이를 듣게 된 마이클이 평소와는 전혀 다를 정도로 시장 상황이 좋지 않았다. 모두들 팝 시장은 한산하다는 말을 할 즈음 혜성처럼 등장한 스릴러가 게임의 규칙을 바꿔버렸다.
‘Thriller’는 1984년 2월 7일 기네스북 세계 기록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Best Selling Album)’으로 공식 등록됐다. 마이클은 수상 소감에서 “이제 와서 뭔가 이룬 것 같다”고 수줍은 목소리로 말했다. ‘Thriller’는 지금까지 미국에서만 3,300만장, 세계적으로 6,600만장이 팔리며 변함없는 베스트셀러 앨범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가 이처럼 넘을 수 없는 벽 흥행을 기록한 것은 그동안 흑인과 백인의 취향으로 확연히 갈렸던 대중음악 장르를 통합하면서 다양한 크로스오버를 통해 인종과 성별, 나이를 뛰어넘는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몸담았던 R&B, 후크, 디스코, 소울 같은 전통 흑인 장르뿐만 아니라 백인 아티스트 폴 매카트니와 록 기타리스트 에디 반 헤일런의 콜라보레이션을 통해 팝 발라드, 록, 헤비메탈까지 넘나든 마이클 잭슨의 끝없는 스펙트럼은 폭넓은 수요를 창출하는 데 성공했다. ‘트릴러’가 망가뜨린 인종과 장르의 장벽은 이후 등장한 스타 뮤지션이 만들어내는 세일즈 숫자 단위를 바꿔버릴 정도로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다. 앨범 한 장이 음악 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종사하던 수많은 이들을 먹여 살릴 정도였다. Thriller를 발매한 CBS 레코드사의 1983년 순이익(earning)은 전년 대비 5배 상승했다.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중문화로 블록버스터 시대가 개막됐다. 스타워즈(1977)가 연 영화산업의 폭발적인 흥행은 1980년대에 이어졌다. 스타워즈 시리즈,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 E.T., 백 투 더 퓨처 같은 대박 상품이 잇따라 미국과 전 세계 극장가를 점령했다. 여름 시즌을 맞아 전국 수천 개 극장에서 동시 개봉해 TV 신문 라디오 잡지에 광고를 모두 게재하고 감독과 배우가 전 세계를 발로 뛰며 홍보를 하고 관련 상품을 한꺼번에 출시함으로써 준비된 모든 폭탄을 한꺼번에 터뜨려 천문학적인 돈을 버는 블록버스터 흥행 공식은 영화뿐 아니라 음반산업에도 적용됐다.
마이클 잭슨이 낸 ‘Thriller’는 앨범 한 장이 블록버스터급으로 돈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 스타 이미지를 반영한 각종 CF 출연, 다양한 미디어를 사용한 앨범 홍보, 뮤직비디오 제작, 머천다이징 판매, 영상 미디어 진출을 통해 히트 앨범의 시너지를 최대한 확장하는 방식을 마돈나, 프린스와 같은 후발주자도 따라하면서 팝 음악과 엔터테인먼트 시장 규모는 이전에 상상하지 못했던 규모로 벌크업했다.
단순한 영상 전달 도구를 뛰어넘어 노래에 생명력을 주고 눈으로 보지 않으면 도저히 체험하기 어려운 시각적 쾌감을 제공하는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는 MTV에서 단골로 내보내면서 앨범 인기와 판매에 큰 역할을 했다. 80년대 영상혁명의 총아 MTV를 점령하는 것이 스타가 되는 길이라는 새로운 공식이 만들어졌다. 뮤지션과 프로듀서, 음반사는 음반을 제작한 뒤 자연스럽게 뮤직비디오를 찍게 됐고 MV는 더 이상 옵션이 아닌 필수로 다뤄졌다. 단순히 노래를 부르거나 가수를 클로즈업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단편영화를 방불케 하는 스토리와 연출, 막대한 예산과 무대장치, 특수효과, 카메오를 혼합한 특급 MV는 역량 있는 연출가를 모으면서 광고나 영화에서 성공한 감독이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거나(존 랜디스, 마틴 스코세지), 뮤직비디오를 통해 이름을 얻게 된 감독이 극영화 시장에 진출하는 사례(마이클 베이, 데이비드 핀처)도 생겨났다.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는 단순한 인기 앨범이나 팝 음악이 아니었다. 스릴러의 인기와 영향력은 이를 넘어선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를 뒤덮었다. 마이클 잭슨의 춤과 노래, 역동적인 이미지는 냉전이 막바지에 이른 1980년대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 미국 자본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우월함을 널리 알리는 소프트파워를 상징하는 도구로 쓰였다. 미국 정부나 주류사회에 반항적이고 적대적이었던 대부분의 흑인 가수나 아이콘과는 달리 정치적인 색깔을 드러내지 않고 극도로 얌전하고 보수적인 모습을 보인 마이클 잭슨은 백인 주류와 중산층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문화상품이었다.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로 이뤄낸 클라이맥스는 1984년 2월 28일 LA에서 열린 26회 그래미 시상식이었다. 4년 전인 1980년 22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야심찬 솔로 앨범 ‘Off the Wall’이 물을 마신 뒤 칼을 갈은 마이클에게 멋진 복수전이 될 것이었다. 한 달 전 펩시콜라 광고를 찍고 머리카락에 불이 붙어 화상을 입은 뒤 치료에 전념하던 마이클은 자신의 승리를 미리 예감한 듯 얼굴을 가리는 커다란 선글라스와 아프리카 왕족 같은 복장을 하고 시상식장에 나타났다. 이변은 없었다.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 브루스 스웨디안은 ‘Thriller’와 앨범 수록곡으로 8개 주요 부문을 휩쓸며 그래미상 8관왕이라는 첫 기록을 세웠다.
‘Thriller’는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과 ‘베스트 팝 보컬 퍼포먼스’, Beat It이 ‘올해의 레코드’와 ‘베스트 록 보컬 퍼포먼스’, Billie Jean이 ‘베스트 R&B 보컬 퍼포먼스’와 ‘베스트 리듬 앤 블루스 송’,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가 공동으로 ‘올해의 프로듀서’, 브루스 스웨디온이 ‘베스트 엔지니어드 레코딩’을 수상했고, ‘Thriller’는 8개 부문 트로피를 차지했다. 여기에 마이클 잭슨과 퀸시 존스가 영화 ‘E.T.’ 오디오북 내레이션을 통해 ‘최우수 어린이 레코딩’까지 받았다.
기네스북에 ‘Thriller’가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록된 것과 그래미 시상식 8관왕을 석권한 것은 마이클 잭슨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럽고 가슴 벅찬 달성이었다. 20대 중반이었지만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20년을 거친 베테랑 뮤지션 MJ는 이로써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톱스타 자리를 공식 인정받았다. ‘팝의 황제(King of Pop)’가 누구냐는 질문에 모두 망설이지 않고 ‘마이클 잭슨!’을 환호하는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